포스코신문-김학기 전회장님 인터뷰 게재
포스코신문 7월 18일자 15면에 당 학회 김학기 전회장님의 인터뷰기사가 아래와 같이 게재되었다.
<포스코신문에 게재된 김학기 전회장님 인터뷰 기사 원문>
김학기 2대 포항제철소장
1977년 제강사고 발생… 박태준 사장님이 직접 일본에 복구지원 요청
고로 첫 화입일 맞추려 건설요원 안전모 빨갛게 칠하고 비상근무 돌입
건설현장 모래바람 속에 귀청 때리던 ‘파일항타’소리 아직도 생생해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후배들… 새로운 도전위한 에너지 충만 흐뭇
1977년 제강사고… 위기상황 극복에 모두가 동참
▶사진설명: 우리나라 최초의 고로인 포항 1고로 화입을 하루 앞두고 1973년 6월 7일 1고로 운전실에서 박태준 사장에게 화입준비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김학기 제선부장(왼쪽에서 세 번째). 김 소장은 고로화입 4회, 재임기간에 조강 생산량을 5배(103만 톤에서 550만 톤으로 증강) 이상 늘린 것 또한 보람이라고 말했다.
▶사진설명: 1977년 4월 24일 발생한 제강공장 화재현장에 도착한 김학기 제철소장이 사고현황을 임직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포스코는 즉각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긴급복구에 들어가 34일 만에 정상조업을 재개하는 놀라운 투혼을 보여줬다. 왼쪽부터 당시 김학기 제철소장, 장경환 상무, 고준식 부사장, 정명식 상무 등의 얼굴이 보인다.
 
쉬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약간 뜸을 들인 후에 운을 뗀 김학기 제2대 포항제철소장은 바로 ‘제강사고’ 이야기를 꺼냈다.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한 ‘트라우마’란 말 들어봤지요? 나는 지금도 36년 전에 얻은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어디를 가다가도 어수선한 공사현장 같은 데를 보면 바로 그 전쟁터 같던 제강사고 장면이 겹쳐져 떠올라요. 꿈에도 가끔 나타나고.”
1977년에 발생한 포항제철소 제강사고 이야기였다. 한 기능공의 순간적인 부주의로 제강공장 전체가 마비되었던 사고는 김학기 소장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여기 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어요. 제철소 현장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리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도 그 이야기부터 하지 않고는 다른 이야기를 풀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당시 제강사고는 크레인 운전공이 3호 전로에 장입할 쇳물을 1호 전로와 1호 혼선로 사이에 쏟아버림으로써 발생되었다.
“4월 24일 새벽이었어요. 쏟아진 쇳물이 두 개의 케이블 덕트로흘러들어가 케이블이 타버렸어요. 이어서 취련 중이던 1호 전로의 랜스 승강용 케이블과 전로 경동용 케이블에 옮겨 붙자, 전로가 오작동을 일으켜 기울어지는 바람에 전로에 들어 있던 쇳물이 흘러내려 1호 전로 제어실용 케이블 덕트로흘러들어가면서 2차 사고로 이어졌어.”
김학기 소장은 지금도 36년 전 그 현장에 서 있는 듯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늘이 온통 노래졌어요.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넘어도 한참 넘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지.
회사는 물론 국가경제, 나아가 민족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구나 하는 자책감에 너무나 괴로웠어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를 거야. 내 인생에 그런 시련은 없었어요.”
당시 박태준 사장은 3?4기 원료의 장기공급 및 4기 설비 차관 교섭을 위해 싱가포르, 호주를 거쳐 일본에 체재 중이었다.
보고를 받은 박태준 사장은 제강설비 공급사인 일본의 이토추상사를 비롯해 관련 업체에 복구에 필요한 기자재와 기술인력의 긴급 지원을 요청하였다.
“4월 25일부터 일본강관 그룹의 기술진인 후지전기 기사 2명을 비롯해 가와사키중공업?이토추상사?금촌제철소?구보다제철소의 기술진 47명이 속속 현장에 도착, 복구대열에 합류하면서 수습의 가닥이 잡혔어. 그때 복구작업을 총지휘하던 김준영 공작본부장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 어떻게 그리 일찍 저세상으로 갔는지….”
일관제철소는 고로에서부터 압연까지의 모든 공정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제강공정이 정지되면 전후의 모든 공정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쇳물을 받아줄 데가 없으니 고로 조업을 쉬어야 하고, 반제품이 없으니 압연라인 역시 공장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당시 현지에 와 있던 일본의 JG 기술진은 고로를 휴풍(休風)하라고 했지.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거야.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휴풍이 뭔가, 고로의 불을 끄는 것 아닌가. 안 되겠다 싶어서 내린 결정이 ‘모래홈 주선’이었어. 모래를 깔고 거기에 홈을 만들어 홈으로 쇳물을 흘려 냉선을 만드는 방법이었어. 압연라인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슬래브를 수입해서 그걸로 조업을 했지.
제철소에서 반제품은 잘 팔지를 않아. 한 공정만 더 거치면 고가의 제품이 되는데, 중간제품을 팔려고 하겠어. 업무지원 부서가 노력한 결과였지만, 일본 업체에도 무척 고마운 생각이 들었어요.”
복구하는 동안 정부는 물론 포항지역의 각급 기관장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고, 직원 부인들로 구성된 새살림부인회에서는 철야작업에 매달리는 현장 작업원들에게 매일 야식을 날랐다. 이야기는 복구 이후로 이어졌다.
“사고 68일 만인 7월 1일 1호 전로를 마지막으로 복구함으로써 제철소 전 공정의 생산기능이 회복되었어요. 기쁘다고 할까.환희스럽다고할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지. 이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때라 생각하고 박태준 사장님께 사의를 표명했어요. 그런데 다음 날 임원회의에서 사장님께서 ‘이번 사고에 대해 대외적으로는 사장인 내가 책임을 진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셨어. 사면이라는 은전을 입었지만, 나로서는 그게 더 괴롭더군.
전쟁터를 방불케 한 현장… 인간의 한계에 도전
여기까지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낸 김학기 소장은 이제 좀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화제를 바꾸었다.
“내가 왜 제강사고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느냐 하면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그 무슨 좋은 일도 좋은 일일 수가 없고, 그 어떤 자부심도 내비칠 수가 없기 때문이야.
나로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참여하여 성공을 보았고, 그것이 국가 중화학공업의 근간이 되어 경제개발을 이룩하였다는 자부심이 왜 없겠어. 나는 20대 초반 첫 직장부터가 제철소였어.
1955년 대한중공업공사에 들어갔지. 당시 국영기업으로서 지금 현대제철의 전신이야. 연산 6만 톤 규모라면 지금으로선 우습지만 그때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어요.
당시 정부가 보유한 외화 총액이 500만 달러도 안 되었는데, 대한중공업공사 건설에 150만 달러를 들였으니 대단한 것 아니겠어. 고로는 없었고 제강과 압연 라인만 있었어요.”
무거운 분위기가 가라앉고 이야기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여든이 넘은 대한민국의 엘리트 엔지니어가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던 20대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가면서 스스로 젊음을 느끼는 듯했다.
“이후 직장을 옮겨 동국제강 기획실장으로 근무할 때였어. 대학 은사인 윤동석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포스코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거야.
당시포스코 전무이사로 계셨지. 그래서 서울 YWCA 회관으로 박태준 사장을 찾아뵈었어. 첫 대면이었지. 그때 내가 받은 첫인상은 첫째, 멋지고 훌륭하게 생겼다. 둘째, 믿음직스럽다. 셋째,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이런 것이었어요.”
그는 사람의 일생이란 만남의 연속이고 이 만남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약간의 망설임이 없지는 않았어요. 당시 동국제강에서 받은 급여가 포스코 동급의 세 배 가까이 되었어. 아내와 상의를 했지.
마침 그때 아내가 막내를 임신하여 만삭이 되어 있었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 이 아이가 아들이면 포스코로 가고, 딸이면 동국제강에 남으라는 거였어. 당시는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해 있을 때였고, 아내는 태아가 아들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거야. 마침 사내아이를 낳았고, 포스코에 들어갔지.”
인생의 대전환점이 된 포스코 입사와 그 이후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포스코에 입사하자마자 경제기획원이 계획한 10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설 타당성 검토 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일을 시작했어.
정부 팀이었지만, 정문도 차관보를 위원장으로 하여 한국은행?산업은행?KIST?포스코 등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지.
그땐 이미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의 제철소 건설 계약이 해지되고 일본으로 방향을 선회한 때였어요. 대일청구권자금 일부와 상업차관으로 103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에 일본이 최종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당시박태준 사장께서 대일교섭단을 이끌고 동분서주한 결과였지. 그때 나는 교섭단 실무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나중 설비구매 계약 때는 제선 분야를 맡아 일본에 오래 가 있었어요. 엔지니어로서 소중한 경험을 했어.”
이야기는 포항 건설현장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의 일이 기획?설비구매 등 화이트칼라 쪽이었다면, 포항 건설현장에서의 업무는 그야말로 본격적인 엔지니어로서의 활동이었다.
“1970년 7월 10일, 제선설비부장 명령을 받고 포항 현장으로 내려왔어요. 당시 조직은 포항제철건설소장 밑에 제선설비부장?제강설비부장?압연설비부장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건설 기자재는 거의 전부 일본으로부터 들여왔고, 기술도 절대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어요. 국산 자재라야 시멘트?모래?강관파일 정도였지.
기술도 경험도 없는 전무의 상태에서 증설도 아닌 그린필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사업인지 절감하던 시절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포항제철소 종합착공식이 열리고 24개 단위설비가 착공되면서 포항 건설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때는 그 넓은 부지 위에 중앙도로만 겨우 포장되어 있었는데, 나는 제선 서브센터에 있었어요. 차를 타고 롬멜하우스로 가는 중앙도로는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투성이, 모래투성이었어.
24개 단위설비 부지에서 한꺼번에 파일 항타 작업을 한다고 상상해봐요. 전쟁터의 포성도 그렇지는 않을 거야. 현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무실에서 바로 옆의 사람과 얘기할 때도 고함을 질러야 했어.
그런데 1971년 가을 추석 때 2~3일 쉬었어요. 건설회사 직원들이 다 빠져나가고 포스코 직원들까지 모두 귀향길에 오른 뒤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세상에 이런 적막강산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어. 귀청을 때리던 그 파일 항타 소리가 사라진 세상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어요.”
1973년으로 접어들어 6월 8일로 고로 화입 일정이 잡혔는데, 일본 JG 기술진은 6월 8일 화입은 어렵다고 해서 고로 건설요원이 안전모를 빨갛게 칠하고 비상근무에 들어간 이야기가 이어졌다.
시공업체에만 맡겨서는 도저히 화입 예정일에 맞출 수 없어 포스코공작부 직원들까지 총동원하여 주야로 돌관작업을 한 결과 겨우 예정일을 맞출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땐 사명감이니 개척정신이니 하는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당장의 일에 파묻혀 있었으니까. 다들 무척 고생했지.”
6월 8일 고로 화입과 다음 날 첫출선에 얽힌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포스코의 생생한 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6월 8일 오전 10시에 화입식이 있었는데, 나도 화입에 동참했어요. 나보다 고위직이 많았는데, 박태준 사장님의 특별배려로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지요.
이후 나는 2고로?3고로?주물선고로까지 화입에 참여했으니 복 받은 인생이야. 고로에 불을 지피고 나니 묘한 생각이 들더군. 설렘?기대?두려움?불안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어.
다음 날 첫출선 때까지 현장을 지켰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그런 표정이었어. 6월 9일 오전 7시 출선 예정시간이 다가오자 사장님을 비롯한 여러분이 주상으로 모여들었어요.
그런데 초산(初産)은 으레 산고를 겪는다고 했던가, 자꾸 출선이 지연되는 거야. 나도 처음에는 주상에 있었는데, 초조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노전으로 내려갔어.
개공기로는 안 되겠다 싶어 산소 랜스 파이프에 산소를 불어넣고 출선구를 녹인 후에야 출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때 노전에 있었기에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용선을 다른 사람들보다 1~2초 먼저 봤지.
이후 1기 조업이 안정되었을 무렵인 1976년 2월 6일 제2대 제철소장으로 부임했지요. 그 뒤로는 3년마다 설비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어. 정말 엄청난 성장기였어. 그 당시 말로 이루 다할 수 없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묵묵히 그리고 불평없이 사명감 하나로 따라준 사람들이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워요.”
▶사진설명: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당시 세계적으로도 대형 고로인 내용적 3795㎥의 포항 3고로 화입(1978.12.8)을 앞두고 부대설비가 속속 준공됐다. 왼쪽부터 포항 3고로공장 변압기 가동식에 참석한 김명준 제선부차장, 신치재제선부장, 조천희 계장, 조용선 부소장, 김학기 제철소장, 강창오 공장장, 심인보 상무(건설본부 부본부장).
자신감 넘치는 후배들 모습 자랑스러워
김학기 소장은 초기 제철소 건설자금 확보와 기술도입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혔다.
“만약 KISA만 붙들고 있었다면 실패하고 말았을 거예요. 설령 KISA 측이 자금을 공여했다 해도 지금과 같은 성공은 어려웠을 것으로 봐요. 역설적으로 KISA와의 계약이 해지된 것이 전화위복이었다는 거지.
일본과 손을 잡았기에 1기설비가 103만 톤 체제로 출범할 수 있었고, 기술협조 또한 순조롭게 이루어졌어요. 만약 유럽이나 미국의 기술을 들여왔다면 비상시 즉각적인 기술협조는 불가능했을 거요.
당시 일본 내에서도 한국의 제철소 건설 협조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어요. 제철산업은 국가위신산업(prestige industry)이고 제철기술은 이전기피 기술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불행한 역사가 있었지만 최소한 제철산업에서만큼은 일본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에요.”
여기까지 물 흐르듯이 술회한 김학기 소장은 마지막으로 후배에게 남기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1년에 한두 번씩 제철소를 찾아요.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갖춘 제철소를 움직이는 후배들의 모습은 여유 있고 늠름하고 자신감이 넘쳐요. 참 보기 좋아. 자랑스럽고 흐뭇해.
무언가에 쫓기고 두려움이 앞선 우리 창업세대와는 완전히 딴판이야. 자신감은 자칫 자만에 빠지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 후배들에게는 반드시 에너지가 될 거야. 그것이 포스코 정신이니까.”
김학기 소장은 제철소를 떠난 지 33년이 되었지만, 마음은 항상 포스코 현장에 있었다. 대를 이어 가꾸어온 참으로 소중한 민족적 자산을 잘 끌어가야 한다는 그의 당부에는 후배들에 대한 기대와 함께 강한 신뢰가 묻어났다.
-출처: 포스코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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